'현대사의 증인' 리영희 선생 끝내 타계

2010. 12. 5.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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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경년 기자]

간경화로 투병중이던 리영희 선생.(지난 8월 모습)

ⓒ 권우성

[2신 보강 : 낮 12시 40분] "선생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 안타깝다"

5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리영희 선생의 빈소가 마련돼, 조문객들의 조문이 시작됐다.

리 선생의 아들 건일(49·삼성SDS 부장), 건석(46·녹색병원 외과 과장)씨와 딸 미정(48), 사위 오석근(49·KT파워텔 전무)씨 등은 이날 오전 일찍부터 조문객들을 맞았다. 둘째 아들 건석씨는 "아버지는 간경화가 심해 복부가 차 호흡하는 데 힘겨워하셨다, 편안하게 가시라고 진통제를 놔드렸다"며 "아버지는 3주 전부터 대화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부터 리 선생의 언론인 선후배를 포함해 시민사회 각계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영전에 고개를 숙였다.

1960년대 리영희 선생과 < 조선일보 > 에서 함께 근무했던 임재경 < 한겨레 > 초대 부사장은 "1960년대 당시 신문이 박정희 정권의 통제를 받고 있을 당시, 계간지 < 창작과 비평 > 에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던 리영희 선생이 기억난다"며 "또한 < 한겨레 > 창간 이후 리 선생을 < 한겨레 > 논설고문으로 모셨던 일도 생각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날 조문객들은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창했던 리 선생의 타계를 더욱 안타까워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리 선생은 생전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려고 했다"며 "리 선생의 지혜가 필요한 2010년 이 시점에서 리 선생이 타계해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다.

한편, 리영희 선생의 장례는 4일장으로 민주사회장으로 진행된다.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재경 초대 < 한겨레 > 부사장, 고은 시인으로 결정됐다. 또한 고광헌 < 한겨레 > 사장, 박우정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이사장 < B > 등이 맡는다. < /b >

리영희 선생의 영결식은 8일 오전 6시 30분에 진행되며, 이어 리 선생의 영현은 오전 10시 경기 수원시 연화장으로 옮겨져 화장된다. 평안북도 운산 출신인 리 선생의 장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로 잠정 결정됐다. 아들 건석씨는 "아버지가 직접 장지를 국립 5·18 민주묘지로 선택하셨다"고 밝혔다.

[1신 수정 : 5일 새벽 3시 20분]

'한국 현대사의 증인'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이 타계했다. 향년 81세.

리영희 선생은 지병인 간경화로 투병중이었는데, 5일 새벽 0시 30분경 끝내 사망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선생은 지난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재직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하여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같은해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한 뒤 1972년까지 합동통신 등에서 외신부장을 지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재직중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 복직했으나 같은 해 다시 해직된 뒤 1984년 복직하였다.

1988년 한겨레신문사 비상임이사 및 논설고문을 지냈으며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했다.

저서로는 < 전환시대의 논리 > (1974) < 우상과 이성 > (1977) < 분단을 넘어서 > (1984) < 역설의 변증 > (1987) < 자유인, 자유인 > (1990)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1994) < 스핑크스의 코 > (1998) < 반세기의 신화 > (1999) 대담집 < 대화 > (2005) 등이 있다.

선생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체제를 신랄히 비판하고 그들의 허위의식을 벗겨내는 언론과 저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면, 그로 인해 수 차례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다. 특히, 70-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의 의식을 일깨워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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