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학생의 '중화 민족주의', 도를 넘었다

입력 2008. 4. 28. 11:21 수정 2008. 4. 2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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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송주민 기자]

성화봉송 행사 시작 전,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유학생들

ⓒ 송주민

솔직히 처음에는 부러웠다. 휘날리는 오성홍기, 그리고 "중국 만세"를 외치는 그들의 강한 민족적 자부심이 말이다. 수천명에 달하는 유학생들이 모국의 국기를 흔들며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붉은 물결도 신선했다. 입으로는 "닥쳐라 CNN"을 외쳤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환했다. 바다 건너 모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전초전격 행사인 '성화 봉송'은 타향살이 동포들에겐 일종의 성대한 축제였다. 삼삼오오 모인 중국 젊은이들은 울려 퍼지는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과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일까. 중국 젊은이들의 모국에 대한 환호성은 잊고 살았던 민족성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문득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 한가운데 서 있었던 지난 2002년이 떠올랐다. '붉은 악마' 복장과 유사한 중국의 붉은 물결에 휩쓸려 있으니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들의 축제 분위기에 매료돼 들떴던 감정들이 다시 이성을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수천명의 중국 학생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Pride of China(중국의 자부심)"를 외치며 오물투척을 한 순간에는 도를 넘은 '중화 민족주의'에 대한 공포감마저 밀려왔다.

중국 유학생들의 특별한 자부심... 거기까진 좋았는데

성화봉송을 기다리며 '중화의 자부심'을 표현한 피켓을 든 한 유학생

ⓒ 송주민

27일 있었던 올림픽 공원 취재에서 많은 중국 유학생들을 만났다. 대략 50명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서툰 한국말 때문일까. 그들은 십중팔구 "Pride of China(중국의 자부심)"란 영어 표현으로 입을 열었다. 참여 동기를 묻는 데 대한 답변의 시작은 대부분 이와 같았던 것. 거기까지는 좋았다.

티벳 사태에 대해서 "국내에서 일어난 스쳐 지나가는 지역 분쟁"(한국과학기술교육대 한아무개 유학생), "중국이 무슨 무력을 사용했나? 치안 유지를 위해 그런 것"(고려대 어학당 백아무개 유학생)이라며 "우리는 하나"를 외치는 유학생들의 모습도 해외와 다른 내국인의 의견표명 정도로 이해했다.

건국대 재학 중인 한 유학생의 "티벳 사태는 독립을 원하는 국외의 나쁜 사람들이 돈을 받고 중국에 와서 벌인 난동"이라며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을 탄압하기 위해 왜곡된 보도를 일삼는다"는 주장도 서툰 한국어 표현이라 가다듬지 않은 표현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또한 "Western Media Stop Bullshit(서구 언론들은 헛소리 그만 해라)", "Listen, who is afraid?(들어라, 누가 무섭나?)등의 피켓도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정당한 표현 행위로 보면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자신감 있고 직설적인 표현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민족주의'가 '전체주의'로 변한 순간

피켓을 잃고 중국 유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야유를 받고 있는 데이빗씨

ⓒ 송주민

중국 유학생들의 '중화 자부심'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 사건은 오후 2시 20분경 '성화 봉송' 시작과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몽촌토성 지하철역 1번 출구 부근에서 미국인 데이빗씨는 'Improve Human Right(인권을 개선하라)'란 문구의 피켓을 혼자 들고 서서 중국 유학생들이 몰려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그를 본 붉은 물결은 성난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오성홍기를 둘러싼 중국 유학생 30여명은 순식간에 데이빗씨를 포위했다. "중국 만세" "북경 만세"를 외치며 데이빗씨를 둘러싼 유학생들은 그가 든 피켓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피켓은 산산조각 난 채 바닥으로 나뒹굴어졌다.

데이빗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유감을 표했지만 중국 유학생들의 "중국 만세" 외침은 끊이질 않았다. 데이빗씨는 "나는 중국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일 뿐"이라며 "(이런 반응이) 매우 놀랍다"면서 혀를 찼다.

'중화민족의 자존심'이 전체주의적인 마녀사냥으로 본격화된 것은 "인권 없이는 올림픽도 없다"며 길 건너편에서 시위를 벌이던 한국 시민단체를 본 순간부터다. 첫 주자로 성화를 든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이 서울 봉송에 나서자 '성화 봉송' 저지 시민단체들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중국 유학생들은 삿대질을 하며 시위대에 야유를 퍼부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학생들은 폴리스라인을 뚫고 도로를 점거하며 길 건너편 쪽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순식간에 행사장은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물통부터 던지기 시작한 중국 유학생들은 깃대·돌, 심지어는 음식물까지 난사하기 시작했고, 시민단체들은 부랴부랴 우산을 펴서 투석행위를 막았다. 수천명에 달하는 붉은 인파속에 100여명 정도의 한국 시위대들은 경찰에 의지한 채 반대 목소리를 이어갔다.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립중인 중국 유학생들 모습

ⓒ 송주민

중국 유학생들의 공격을 우산 등을 펼쳐든 채 맞서고 있는 '성화봉송' 저지 시민단체 회원들

ⓒ 송주민

잘못 표출되는 '중화 중심주의' 경계해야

누구의 주장이 논리에 맞고 사리에 맞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중국 유학생들은 물론이고, 이날 모인 보수˙기독교˙탈북자 단체의 주장도 100% 옳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시위 태도에 대한 문제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

'성화 봉송' 저지 시민단체들은 허가된 장소(올림픽 공원 건너편 한미약품 빌딩 옆 인도)를 벗어나지 않고 시위에 임했다('올림픽 공원 앞에서의 시위'만을 지칭하여 언급함). "티벳 인권유린을 중단하라"는 내용으로 유학생들의 '중화 민족주의'를 자극하긴 했지만 부적절한 의사 표현은 없었다.

앞서 있었던 미국인 데이빗씨도 피켓만을 높이 들고 개인적인 의사표현을 했을 뿐이다. 그는 아무 말 않고 "티벳은 우리 땅"을 외치는 중국 학생들 주위를 맴돌았다.

중국 유학생들도 이에 맞서 자신들의 의사표현을 강하고 직설적으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상대방의 의사표현도 인정할 줄 아는 자세는 매우 서툴렀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에 임하던 사람들을 수적 우위로 짓누르는 것은 문제다. 다양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국가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화의 위대함'은 잘 알겠다. '프라이드'라 외치는 것까지는 다 이해한다. 다만 민주국가로 유학을 왔다면 최소한 그 나라의 법과 제도는 존중해 주길 바란다.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사표현을 막무가내로 막는 행위는 이제는 좀 자제해 달라. 폭력의 자유는 없지만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상식이다.

이날 사태를 보면 최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서구·반티벳'의 움직임이 감정섞인 민족주의와 획일적인 전체주의로 잘못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시대착오적인 '중화 중심주의'로 흐르는 듯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어 매우 착잡하다.

중국 유학생들의 항의에 된서리를 맞고 단상에서 내려온 서경석 목사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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