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반 되면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녀요?학생에게 '자율'학습 선택권 주면 학원가죠"

입력 2008. 4. 16. 08:58 수정 2008. 4. 1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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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대치동 학원 홍보물. 자물쇠반, 회초리반이란 글귀가 선명한 대치동 학원 홍보물.

ⓒ 윤근혁

"이명박 정부 교육 정책을 보면 우리 입시학원 운영하는 사람들도 자주 놀라요. 그러니 교사와 학부모들은 얼마나 더 충격적이겠어요. 학생들은 이게 뭔가 싶을 거예요. 해도 너무하는 것이고, 이건 막 나가자는 거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치동 학원가를 취재하면서 알게 된 이 아무개 학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원장은 지난 3월 서울시의회가 학원 24시간 교습을 허용했을 때 "한 마리 토끼를 거저 잡았다"고 반겼던 사람이다. 그런 이 원장도 우열반 편성, 0교시 및 심야보충 허용 등에 대해서는 "충격"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우리 사정이야 절대 나빠지지 않겠지만 우열반이 편성되면 학생들이 받을 상처는 매우 클 것"이라며 "교육 당국이 학생들 상처에 연고 발라줄 것도 아니면서, 너무 앞으로만 밀고 나간다"고 덧붙였다.

교육과학기술부가 15일 "초·중·고교의 자율성을 확대하겠다"며 밝힌 내용은 대치동 학원가에서도 '뉴스'였다. 이날 발표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기존 지침 29가지를 폐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학교자율화 추진계획'이다. 주요 내용은 학생 성적에 따라 우열반 편성이 가능해지고, 0교시 수업 및 밤 10시 이후 자율학습 허용, 방과 후 수업에 사교육 업체 참여 가능 등이다.

이 소식을 접한 학생과 학부모들은 대부분 우려를 나타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서울 대치동에서 만난 김수현(중2)군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앞으로 최소한 4년 넘게 남았는데 까마득하게 느껴진다"며 "내일 아침 잠에서 깼을 때 그냥 4년이 훌쩍 지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열등반 되면 '쪽팔려서' 어떻게 학교 다니냐"

옆에 있던 친구 이선호(중2)군도 "솔직히 반에서 중간 정도 밖에 못하는데, 열등반에 들어가면 '쪽팔려서' 학교 다니기 싫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김군은 "우등반에 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어차피 1등부터 꼴등은 정해질 텐데, 항상 우등반에 낄 자신은 없다"고 말했다.

안양 범계중학교에서 대치동까지 '유학' 왔다는 김 아무개(중2)양도 "우열반이 생기면 아이들끼리 서로 멀어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김양은 "고등학교에 가면 0교시 수업이나 심야 자율학습은 할 것이라 예상은 했다"며 "우등반에 끼려면 어느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게 좋을 지 미리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대체로 우열반 편성에 많은 우려를 나타냈다. 속된 말로 "열등반에 들어가면 쪽팔려서 어떻게 사냐"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0교시 수업과 심야자율학습 등은 대체로 예상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많았다.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치동에서 만난 경기여고 1학년 장 아무개양은 "정부가 심야 자율학습 운영 권리를 일선 학교에 준다면, 학교도 역시 정정당당하게 학생들에게 자율학습 선택의 자율권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양은 "그것만 보장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학교가 이름 그대로 '자율' 학습을 실천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밤 10시께 자가용을 끌고 대치동 학원가로 중학교 3학년 딸 마중을 나온 학부모 김지혜(43)씨는 학생의 선택권을 강조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교육청이 0교시와 심야자율학습을 단속했다면 이젠 학생들에게 자율권을 주는지 주지 않는지를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선택권이 주어지면 내 아이는 계속 학원에 보낼 생각이고, 선택권 보장이 안되면 당당하게 따질 것"이라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오래 붙잡아둘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학생에게도 자율학습 선택권 달라, 학원 보내게"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딸이 수학·영어 전문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김씨는 간식으로 빵과 음료수를 건넸다. 김씨는 기자에게도 커피도 권했다. 가만히 커피를 마시던 김씨는 딸이 듣지 못하게 조용한 말로 "나도 딸 나이 때 공부 하느라 고생을 했는데, 딸이 그 때와 똑같이 고생하는 걸 보면 속상할 때가 많다"고 했다. 김씨는 이야기를 조근조근 이어갔다.

"좀 세상이 좋아지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남들보다 조금 살만하기는 한데... 내가 딸을 억지로 고생시키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게 딸이 행복해지는 길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요. 정부를 욕하다가도, '나는 뭐 지금 잘 하고 있나?'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김씨는 "빨리 가자"는 딸의 말에 차에 시동을 걸고 현장을 떠났다. 김씨가 떠난 뒤에도 학생들 마중 나온 자가용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또다른 학부모 용 아무개(49)씨는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아들이 열등반에 들어가는 건 못 참는다"며 "잠 못 자고 고생하는데, 열등반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냐"고 밝혔다.

"우열반·0교시 지금도 있는데... 몰랐어요?"

취재를 마치고 대치동을 떠나 집 근처인 수원역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그 시간에도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보였다. 막차를 탔더니 기자가 졸업한 고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앉아 있었다. '선배'라는 말을 생략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어봤다. 그들은 심드렁하고 냉랭했다.

열등반 친구들은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 청소년위원회

"우열반이요? 사실 그거 지금도 있어요. 성적 좋은 애들은 따로 모아서 선생님들이 논술 같은 거 가르쳐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지금도 새벽에 갔다가 밤늦게 들어가잖아요. 이게 0교시 수업이고 야간자율학습이잖아요. 이렇게 하는 학교 많아요. 몰랐어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후배'의 짜증 섞인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더없이 피곤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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