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결혼제도에 반기.. 이유있는 불복종의 삶"

글 유인경·사진 박민규 기자 2010. 3. 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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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우씨가 분석한 '30대 여자들..'의 비혼 속사정 주체성·자립심 키우며 성장..집 마련·양육 부담·경력 단절도 '기피' 한몫

프리랜서 편집자인 윤단우씨(37)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서른을 넘겨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삶, 날씨를 묻는 것처럼 흔한 "왜 아직 결혼 안 했어?"란 질문에 시달려야 하는 자기 또래 30대 여성들의 정서를 그리고 싶었다. 소설 습작을 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찾고 주변의 30대 여자들을 돌아보다 깜짝 놀랐다. 너무나 많은 멀쩡한(?)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하고 있었고, 언론에선 이들을 대한민국을 저출산국으로 만든 '국가 재앙의 주범'으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엄마 세대엔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던 결혼이 딸 세대에선 선택입니다. 요즘 30대 여자들이 가장 보편적인 안락과 평화의 조건인 결혼, 즉 남편과 아이를 거부하는지 궁금했어요. 정말 그들이 이기적인 생각에서 결혼을 늦추거나 회피해 저출산의 주범이 된 걸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 동료이던 위선호씨(40)와 더불어 주위의 30대 여성 50여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각국의 자료를 모으다 보니 소설이 아니라 < 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 란 책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만난 30대 비혼여성들은 환경도, 직업도 달랐지만 공통분모가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시대에 태어나 자매나 남매로 자랐다. 처음으로 초등학교에서 학급 반장으로 여자가 선출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스스로 반장이 되기도 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재학 중 영어권 국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예전 여성들에 비해선 물론이고 남성들과 비교해도 앞선 수준이며 삶의 발전속도도 눈부시다. 하지만 자신보다 좋은 조건에 10원이라도 더 버는 능력 있는 남자를 찾으려고 위를 올려다 보니 몇 명 남아 있지 않다. '마땅한 남자'들은 이미 어리고 순진한 20대 여성들을 선택했다. 어릴 때부터 주체성과 자립심을 '주입'받고 자란 데다 경제적 능력까지 가진 여성들이 '마땅하지 않은 남자'와 손해 보는 계약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윤단우씨는 30대 여자의 결혼파업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들로 어머니를 꼽는다. 어린 시절엔 재능이 뛰어나도 오빠와 남동생들을 위해 희생했고, 결혼한 뒤엔 가족에게 헌신했던 어머니들은 딸들을 통해 '대리전'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딸을 아들처럼 키웠다. 남자처럼 성공하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길 기대한다.

각종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지난해 시장조사 전문기업인 엠브레인EZ에서 딸을 둔 30대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결혼 가치관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딸이 본인처럼 살기 바라는가?"란 질문에 어머니 가운데 87%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어머니 중 68%는 딸의 결혼보다 '직장에서의 성공이 우선'이라고 응답했다. 결혼이 우선이라고 답한 사람은 절반도 안되는 31.8%에 그쳤다.

30대 여성들이 결혼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돈으로 바리케이드 친 결혼제도'가 꼽힌다. 경제가 호황이던 시대에 성장해 풍요를 맛본 이들은 정작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도 이런 삶을 유지하기 힘들다. "숟가락, 젓가락 한 쌍으로 방 한 칸에서 시작했다"는 부모님의 신혼 고생담이 미담으로 들리는 시대도 아니다. 1억원은 있어야 서울 근교 전셋집을 구하고 혼수 비용도 만만치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결혼과 출산 자체가 부의 상징'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직장여성들은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이나 자녀 양육문제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양가의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내집 마련은 꿈꾸기 어렵고 기초적 문화생활조차 힘들다. 상대적 풍요를 경험하고 나서 빈곤층으로 편입된 계층을 '신빈곤층'이라고 하는데, 결혼 후 아등바등 저축하며 살아야 할 '신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들에게 결혼을 망설이게 만든다는 것이 윤씨의 주장이다.

"30대 여성들이 꼭 이기적이거나 철이 없어서 결혼을 기피하는 건 아닙니다. 말이 근사해서 '골드미스'지, 과로에 시달리는 '골병미스'가 대부분이에요. 주변을 둘러봐도 결혼하면 살림이며 양육에 시댁 제사 치르는 일까지 아직은 여자 몫이니 선뜻 결혼제도에 뛰어들기 어렵죠. 이기적인 파업이 아니라 본능적인 모성애와 번식 욕구마저 포기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반기를 든 반항이자 불복종임을 알아야 해요. 이젠 시대와 불화하는 제도인 결혼에 대해 폭넓은 변형을 인정해야 합니다."

윤씨는 프랑스의 '팍스(Pacte Civil de Solidarites)' 같은 새로운 가족제도를 제안한다. '시민연대계약'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제도는 법적 결혼이 아닌 동거제도이지만, 정부는 이 계약을 맺은 커플에 대해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고 조세와 사회보장 등에서 법률혼 관계의 부부와 같은 혜택을 준다. 이 '느슨한 결혼제도' 덕분에 프랑스는 합계출산율 2.0명 시대를 열어 유럽에서 출산율 1위 국가에 올랐다.

윤씨는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자신의 책 소개에 달린 비혼여성을 비난하는 댓글을 보며 남녀 사이의 적대감이 너무 깊어진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 원인과 대책을 연구하려고 한다. "된장녀나 루저남 논란도 그렇고 < 개그콘서트 > 의 '남보원'을 보면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심한 것 같아요. 여자들에게 잘해주는 것을 자부심으로 알던 남성들이 이젠 여자들을 '등골을 빼먹는 얌체'로 여기더군요. 과격해진 남녀의 적개심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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